팔레스타인 남성도 피해자가 될 수 있는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전쟁을 성별화하기

마야 믹다시 (Maya Mikdashi)

2014년 7월 23일

Jadaliyya 

매일 아침 우리는 새롭게 업데이트된 학살의 명단을 확인한다. 이 글을 쓰고있는 현재 (2014년 7월) 이스라엘의 전쟁기계는 백 명, 이백 명, 사백 명, 아니 육백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살해했다. 그러나 이 숫자들은 많은 것을 담지 못한다. 가자지구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고 또 빈곤한 지역 중 하나이며, 대부분의 주민들은 역사적 팔레스타인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온 난민들이다. 가자지구는 잔혹한 포위 상태에 있으며,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이스라엘의 공격으로부터 숨을 곳이 없다. 그러나 이 “전쟁” 이전에도 가자지구는 국제법을 위반한 이스라엘에 의해 주민들이 포로화되고 식민화된, 일종의 격리구역이었다. 가자지구의 주민들은 식량, 식수, 의약품, 심지어 이동까지 이스라엘 식민 지배자들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만일 휴전이 되더라도 가자는 여전히 식민지화되고, 격리되고, 봉쇄된 채일 것이다. 가자지구는 여전히 야외 감옥이자 대규모 난민 캠프로 남을 것이다. 

서구 매스미디어에서 자주 반복되는 희생자들에 대한 한 가지 사실은, 가자지구에서 살해된 팔레스타인인들의 대다수가 민간인이며 그 중 “불균형적으로” 많은 수가 여성과 어린이라는 사실이다. 여성과 어린이의 살해는 끔찍하지만, 이 불편한 사실의 반복에는 한 가지가 빠져있다. 바로 이스라엘의 전쟁기계에 의해 살해된 팔레스타인 남성들에 대한 공적 애도 말이다. 1990년 [페미니스트 군사주의 연구자] 신시아 엔로는 1차 걸프전을 정당화하기 위한 젠더화된 담론의 작동방식을 사유하기 위해 [하나의 단어로 된] “여성과 어린이 (womenandchildren)”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여성과 어린이”라는 일종의 전형적 이미지가 가자지구와 팔레스타인과 관련해 어떻게 유통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이 전형적 이미지는 여러 가지 담론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데, 그 중 두 가지가 도드라진다. 첫째, 여성과 어린이를 젠더와 섹스의 “동일성”에 의해 결합된, 구분될 수 없는 하나의 집단으로 뭉뚱그리는 것, 그리고 둘째, 팔레스타인 남성의 신체 (그리고 아랍계 남성의 신체 일반) 를 언제나 이미 위험한 것으로 재생산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 남성 (15세 이상의 소년, 때로는 13세까지도 포함하는) 의 “민간인”으로서의 지위는 항상 의심의 대상이 된다. 

이스라엘의 가자 전쟁의 이러한 성별화는 테러와의 전쟁에 관한 담론, 그리고 [식민주의/제국주의 연구자인] 랄레 칼릴리가 설득력있게 주장한 바와 같이 보다 너른 반란진압 및 전쟁만들기 담론과 맞닿아 있다. 이 담론 틀 안에서, 여성과 소녀, 10대 미만 소년들의 살해는 주목받아야 하지만, 10대 이상 소년과 남성들은 살아남는다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이유로 유죄로 간주된다. 게다가 10대 이상 소년과 남성들은 점령군 뿐 아니라 민간인 여성과 어린이들에게도 잠재적으로 위험할 것이다. 어린 소년들은 결국 자라나 폭력적인 극단주의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들을 죽여 폭력의 싹을 소멸시켜야 할 것이다. 

이렇게 성별화된 논리구조 안에서, 이스라엘의 가자 전쟁에 대한 비판은 하마스 치하 여성과 동성애자의 “운명”에 관한 주장에 의해 반박된다. 최근 한 이스라엘 대변인은 [인권 변호사이자 국제법 연구자인] 누라 에라켓이 이스라엘의 국제인권 침해를 비판하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 “하마스는 당신과 같은 젊고 자유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여성이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두지 않을 거에요. 하마스는 내 게이 친구들이 섹슈얼리티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도 두고보지 않겠죠.” 이러한 발언은 테러와의 전쟁에 관한 성별화된 담론을 동원하고자 하며, 이는 페미니즘 및 LGBTQ 권리를 이용해 미국 자유주의의 정서적 기반을 건드린다. 이러한 논리구조 안에서 이슬람 혐오 및 이슬람과의 전쟁은 공공의 선이자 국제적 선이 되고, “우리”는 파괴적인 무슬림 및 아랍 남성으로부터 무력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존재가 된다. 랄레 칼릴리는 이러한 논리구조를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로부터 두려워하거나 파괴되어야 할 사람들을 구분하는 성별화된 이야기의 이용”이라고 표현했다. 이 담론은 매우 강력해 ‘사실’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이 담론은 오히려 ‘사실’을 초월하고 무엇이 ‘사실’인지를 사전에 규정해 버린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서의 미국 전쟁기계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전쟁기계는 팔레스타인의 퀴어와 여성, 어린이를 보호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전쟁기계는 그들을 죽이고, 불구로 만들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땅으로부터 그들을 쫓아낸다. 단지 그들이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이유로, 그리하여 온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무런 후과없이 그들을 죽일 수 있다는 이유로. 오늘날 팔레스타인 ‘여성과 어린이’와 팔레스타인 남성의 차이는 그들의 시신 그 자체라기보다는, 누가 이스라엘의 전쟁기계의 “피해자”로서 공적으로 애도될 수 있는 시신인지를 규정하는 주류 담론 프레임의 유통에 있다. 그리하여 팔레스타인 ‘여성과 어린이’의 무수한 사망자 수는 미국 대통령과 유엔이 폭력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할 만큼 충분하지만, 전쟁과 휴전 시기 팔레스타인 남성과 소년들의 살해, 투옥, 불구화는 언급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에서는 정착민 남성, 심지어 군인 남성까지도 팔레스타인의 테러와 공격의 희생자로 여겨진다. 그들의 죽음은 모두 공적으로 애도된다. 그러나 거의 정반대로, 정치범과 표적 암살 희생자 수에서 드러나듯 이스라엘의 주요 표적이 되어 온 팔레스타인 남성과 소년들은 서구 주류 미디어에서 이스라엘의 테러와 공격의 피해자로 여겨지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이스라엘의 정책과 군사행동의 피해자로서 인정받기 위해,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해 싸워야만 하는 자기패배적 위치에 놓여있다. 

성은 종종 태어날 때 발생한 사고처럼 여겨진다. 자궁에서 자라날 때, 우리는 어떤 성이 되기로 선택하지 않았다. 타인들이 우리가 질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여성이고, 또는 페니스를 가지고 태어났기에 남성이라고 결정했을 때 우리는 그 결정에 대해 이견을 제시할 기회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백만 명 이상의 가자 주민들의 원죄–죽고, 불구가 되고, 집을 잃어 마땅하다는–는 팔레스타인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인”이라는 단어가 그들을 위협이자 표적으로 만든다면, “남성”과 “여성”이라는 단어는 그들의 죽음이 어떻게 유통될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팔레스타인인으로 태어나기를 선택한 적도, 그리하여 정착민 식민지배 하에 살기를 선택한 적도, 온 국경에 흩어진 난민 캠프에서 살기를 선택한 적도 없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자발적으로 가자로 이주한 적이 없다. 말콤 X의 말을 빌자면,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에 도착하거나 상륙한 적이 없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땅에 도착하고 상륙했다. 

팔레스타인 남성과 소년들을 배제하는 대신 ‘여성과 어린이’의 살해를 강조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정착민 식민주의의 구조와 성공을 더욱 정상화하고 그 흔적을 지우는 것이다. “민간인”과 “비전투원”은 담론적으로 선택되어 만들어진다. 남성은 항상 또 이미 의심스러운 존재이며, 인간의 육신에 감싸진 폭력의 가능성으로 여겨진다. ‘여성과 어린이’들의 삶의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소멸은 그저 통계적 수치로 덩어리째로서만 말해진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스스로 이스라엘에 위협이 되는지, 그리하여 죽어 마땅한 존재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 존재인지, 그리하여 이른바 “휴전” 혹은 보다 애매한 “평화”라는 포장을 한 식민지배를 받고 살아갈 자격이 있는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혁명가 혹은 이스라엘의 “적”이 되기 위해 굳이 총을 들 필요는 없다. 이스라엘에 위협적 존재가 되기 위해 시위에 나서거나, 짱돌을 던지거나, 깃발을 휘날릴 필요도 없다. 테러리즘의 민간 인프라로 간주되기 위해, 굳이 지하 터널을 통해 음식과 암 치료제를 구할 필요도 없다. 이스라엘에게 위협이 되기란 쉽다. 단지 팔레스타인인이기만 하면 된다. 이스라엘에게 팔레스타인인들은, 그곳에 [팔레스타인인들의 땅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다른 사람들의 존재–혹은 삭제–가 이른바 그들이 “유대 민족국가” 혹은 “유대인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데 불가분하게 얽혀있다는 의식 혹은 무의식을 상기시키는, 골칫거리이자 얼룩이다. 

이처럼 모든 팔레스타인 남성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는 그들을 식별하고, 셈하고, 격리하고, 차단하고, 점령하고, 분열시키고, 권리를 박탈하고, 발전을 저해하고, 포위한 뒤 전쟁을 일으키는 이스라엘의 담론적, 물질적 인프라 안에서 살고있다. 일상화된 이러한 실천들은 더이상 우리에게 충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아메리카 원주민 보호구역이나 호주 원주민 영토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느린 죽음’, 대량학살, 구조적 폭력과 의존성이 지워지고 정상화되는 방식을 고려한다면,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실 오늘날 가자지구의 야외 감옥에서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에 대한 전쟁을 별개의 비난받을 만한 “사건”으로 만드는 것은 이스라엘 정착민 식민주의의 정상화이다. “가자”를 역사적 팔레스타인과 분리시켜 말하고, 식민주의가 하나였던 민족과 영토를 쪼개 만들어진 “서안 지구”와 “가자”를 마치 별도의 분리된 개체인 양 만드는 것이 바로 정착민 식민주의의 성공적 효과이다. 오늘날의 전쟁은 가자지구, 서안지구,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들, 혹은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 시민들이 직면한 일상적인 구조적, 비공식적 폭력–자원독점, 물 부족, 주택 강제철거, 검문소, [유대계] “정착민” 전용도로, 인구 “이전” 논의, 넘쳐나는 감옥,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 시민들의] 이등 시민권 등–과 연속선상에 있다.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의 ‘역사적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정착민 식민지가 되어, 식민주의의 다양한 성공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팔레스타인 남성과 여성, 어린이는 하나의 민족으로, 포위상태와 정착민 식민지 상황에서 함께 살아간다. 그들의 죽음은 생식기관에 따라 다르게 분리되어서도, 그리하여 희생자와 ‘애도할만한 죽음’의 위계를 재생산해서도 안 된다. 죽음의 위계라는 사다리의 정점에는 군인과 정착민을 포함한 유대계 이스라엘인들이 있고, 가장 낮은 곳에 팔레스타인 남성이 있다. 이 위계는 동시에 인종화되고 성별화된 것이다. 이러한 위계구조 속에서 ‘팔레스타인 여성과 어린이’라는 이미지가 부상하고, 폭력이나 “전쟁”이라는 스펙터클 속에서만 공적으로 또 국제적으로 애도될 수 있다. 그러나 이른바 “휴전”의 시간성, 또는 정착민 식민주의 조건 하의 느리고 조용한 죽음들은 ‘여성과 어린이’라고 해도 애도될 수 없다. 모든 팔레스타인인 희생자들–남성, 여성, 어린이–를 군사침공 [이라는 특수한 상황] 뿐 아니라 점령과 식민지라는 일상공간에서도 공적으로 애도해야 한다는 주장은, 곧 그들이 처음부터 살아있을 권리가 있었음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 https://www.jadaliyya.com/Details/30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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