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됨과 학살에 관하여

헤바 고웨이드(Heba Gowayed)

2024년 1월 15일

In These Times 

내가 사는 뉴욕 아파트 창문으로 햇살이 비치는 가운데, 이제 다섯 달 된 내 아이가 신기한 듯 발을 잡는 모습을 지켜본다. 아이는 놀이방 거울 속 자신과 이야기하며 몸을 흔든다. 내 쪽을 보고 내 시선을 좇으며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다. 나는 아이의 존재와 아이가 가져다 주는 기쁨에 대해 엄청난 감사함으로 가슴이 꽉 차는 것 같다. 

그리고 지난 100일 동안 자주 그랬듯이 나는 가자 지구에 대해 생각한다. 

나와 다르지 않게 애써 얻은 아이를,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자비한 폭탄으로 잃어야 했던 한 엄마를 생각한다. 그을음으로 뒤덮인 딸을 필사적으로 껴안고 있는 한 아빠와, 그의 가슴에 늘어진 아이의 통통한 팔과 다리를 생각한다. 이미 생명이 빠져나간 아들의 손에 쿠키를 쥐어주려는 또 다른 아빠를 생각한다–그는 아들이 죽은 채 자신을 맞이할 줄도 모르고 시장에서 그 쿠키를 발견하고 얼마나 기뻐했을까. 공습 받는 가자의 한 병원 신생아 중환자실에 줄지어 있는, 내 아이와 같은 포대기 대신 흰 카판 (장례용 수의) 에 싸여 있을 아기들에 대해 생각한다. 

지난 100일 동안 우리는 아이들의 학살과 그 아이들의 어린 시절의 학살을 목격했다. 살해당한 약 24,000명의 팔레스타인인 중 거의 10,000명은 어린이였다. 그들 각자에겐 이름이 있었다. 좋아하던 색깔과 좋아하던 장난감이 있었다. 부모의 익살스런 표정에 웃음을 터뜨리던 아이들이었다. 

가자 지구 아이들에게 닥친 공포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8,663명의 가자 아이들이 부상당했다. 매일 10명의 아이가 한 쪽 혹은 양 쪽 다리를 잃고, 부상당한 사지는 종종 마취 없이 절단된다. 이스라엘 군대는 어린 소년들을 벌거벗긴 채 공개적으로 끌고 다닌다. 약 25,000명의 아이들이 한 쪽 혹은 양 쪽 부모를 모두 잃었다.

나는 가자 지구에서 부모와 함께 있는 아이들의 이미지와 영상,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사랑과 슬픔에 사로잡혀 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전쟁과 강제이주의 상흔을 계속 견뎌야 하는 사람들과 지난 10여 년 간 일해 왔기 때문이다. 나 또한 어린 시절 이스라엘의 폭격으로부터 피신했던 이들의 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 또한 엄마이기 때문에 가자의 이미지와 영상에 사로잡혀 있다. 부모로서 집단학살 및 대량 아동학살에 항의하는 다른 부모들과 함께 말이다. 아기가 내 몸 안에서 자라고, 발로 차고, 딸꾹질하는 것을 느끼는 게 어떤지 알기 때문이다. 신생아의 오르내리는 가슴을 지켜보는 불안, 내 아이를 위해 품은 꿈의 크기, 그의 기쁨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 그를 지키기 위해 하지 않을 일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로든 내 아이가 낮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가자의 아이들을 지키지 못했다. 가자의 부모들도 지키지 못했다. 이것은 실패한 세계이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실패가 아니다. 가자 지구의 110만 명에 달하는 아이들 대다수는 17년 간 지속된 봉쇄 속에서 태어났고, 뱃속에서부터 위험으로 여겨져 식민 지배자들의 안정을 위해 그 생명과 자유가 박탈당해야 했다. 이는 이스라엘 군대에서 우리가 수없이 봐 왔던 것이다. 2014년 가자 지구 공습 이후, ‘말살된 가족 (Obliterated Families)’ 프로젝트는 사망한 2,200명의 팔레스타인인 중 1/4이 아이들이었고, 그 외에도 1,000명의 다른 아이들이 영구적인 장애를 입었다고 보도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이러한 조건에서 살고있으며, 우리의 세금이 그들을 봉쇄하는 기술을 구축하는 데 쓰이고 있다는 것을 묵인해 왔다. 나는 정치 지도자들이 내 아이와 같은 아랍계 아이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오랫동안 여겨온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들에게 예멘,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아랍계 아이들–우리 아이들은 죽여도 괜찮은 존재이다. 

이러한 공격의 공포에 맞서는,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가자 지구 부모들의 사랑은 그 자체로 항거이다. 지난 11월 3일, 두 아이의 엄마이자 아랍어 교사인 도아 (Doaa) 는 반짝이는 티아라를 쓴 채 컵케이크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다섯 살 딸아이의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다. 그녀는 폭력의 한가운데에서도 딸의 생일을 어떻게든 축하해 줄 수 있어 자랑스럽다며, “딸의 행복은 세상 무엇보다 값진 것”이라고 썼다. 24시간 후 그녀와 그녀의 딸이 함께 살해당한 뒤, 이 이미지는 여기저기 퍼져나갔다. 

누군가가 가자 지구의 남자들이 그을음을 뒤집어 쓴 아기들과 놀아주고 있는 영상들을 모아 “우리 남자들이 얼마나 온화한지 보세요. 그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 라고 말한다. 다정한 아랍계 아빠의 딸인 나는 이 영상을 보면서 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인정하면서도 이런 영상을 굳이 공유해야 한다는 모욕적인 감정 사이에서 갈등했다. 

나는 그을음을 뒤집어 쓴 아기들이 [더 놀라거나 트라우마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누군가 놀아주고 그들의 주의를 분산시켜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이러한 부모의 사랑과 저항의 이미지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가자 지구 사람들의 강인함과 인내심의 증거이다. 이 사진과 영상들은 슬픔에 잠긴 부모들이 [세상을 먼저 떠난] 아이들의 눈과 발에 작별 키스를 하는 모습을 기자들이 촬영할 수 있도록 허락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나는 여기에서 팔레스타인 부모들의 절망적 분노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으려는 의지를 본다. 매미 틸 (Mamie Till) 과 같은 미국 남부의 흑인 엄마들이 그들을 수십년 간 억압해 온 백인 우월주의자들에 의해 훼손된 자식들의 시신을 드러내 보기기 위해 관을 연 채 장례식을 진행하고자 고집했던 것을 떠올린다. 세상에 일말의 부끄러움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래서 이 장면을 본다면, 누군가 폭력을 멈추기 위해 행동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였을 것이다. 이 사진과 영상들은 우리에게 “외면하지 말라”고 말한다. 가자 지구의 부모들은 그들이 견뎌 온 고통이 그것을 이미지로 볼 뿐인 우리에게조차 너무 버겁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의 상실에 관한 이 글이, 오랫동안 글을 써 온 내게 가장 어려운 글이라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내 글이 이 부모들의 사랑과 상실의 깊이를 결코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집단학살 범죄는 한 국가와 민족을 파괴하는 범죄다. 가자 지구에서는 여러 세대에 걸친 가족들이 한꺼번에 살해당해, “WCNSF” (Wounded Child No Surviving Family: 생존 가족이 없는 부상 아동) 라는 새로운 약어가 등장했다. 나는 아이를 갖기 전에는 한 번도 죽음을 두려워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 아이를 돌봐줄 거라고 믿는다. 그들은 내 아이가 어떤 비행기 소리를 좋아하고, 트림을 어떻게 하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내 아이에게 나를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내가 떠난 후 내 아이를 돌봐줄] 그들마저 모두 사라진다면? 가자 지구에서의 대량학살은 단순한 인명피해의 합산을 아득히 넘어선다. 그것은 그들의 삶 속에 담긴 집합적 기억–무수한 사건들, 사람들, 장소들의 상실이다. 이것은 앞으로 올 다음과 그 다음 세대가 계속해서 대가를 치르게 될 상실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그들을 멸망시키려는 식민 지배자의 75년 간의 끊임없는 폭력에 맞서, 수무드 (sumud)–흔들리지 않는 인내를 고집해 왔다. 그들의 땅에서 자유를 얻을 것이고, 그들이 심은 올리브 나무처럼 자라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이다. 

가자 지구의 아이들은 생존 그 이상을 누릴 자격이 있다. 독재자의 변덕에 놀아나지 않는 것 이상을 누릴 자격이 있다. 그들은 미래, 즐거운 미래를 누릴 자격이 있다. 부모와 함께 재잘대고 웃을 자격이 있다. 그들은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 자유롭게 살 자격이 있다. 

원문: https://inthesetimes.com/article/gaza-genocide-children-israel-palestine-mother

DKS Collective Avatar

Posted by

Leave a comment